‘빨갱이’ 낙인이 부른 비극… 이념보다 국민의 생명과 국익이 먼저다

- 여순사건 박찬길 검사 부자 국가배상 판결

- 극단적 이념과 권력의 오판이 남긴 역사적 교훈

1948년 여수·순천 10·19사건, 이른바 여순사건 당시 경찰에 체포돼 정식 재판도 받지 못한 채 총살당한 현직 검사 박찬길.

 

그로부터 78년이 흐른 2026년 10월 29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은 박찬길 검사와 그의 아버지 박인서 씨의 희생에 대해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법원은 경찰이 직무집행의 외형을 갖추고 있었지만 평소의 악감정과 보복 의사에 따라 불법행위를 저질렀다고 판단했다. 박 검사는 재판 절차도 없이 총살됐고, 그의 아버지 박인서 씨 역시 경찰에 끌려가 심한 구타를 당한 끝에 목숨을 잃었다.

 

국가가 뒤늦게나마 책임을 인정했다는 점은 의미가 크다. 하지만 한 가족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이미 사라진 생명은 어떤 배상으로도 되돌릴 수 없다.

 

이번 판결을 단순한 과거사 사건 하나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이념이 법치를 압도하고, 국가권력이 국민의 생명과 인권보다 앞설 때 어떤 비극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경고이기 때문이다.

 

‘빨갱이’라는 낙인, 법치주의를 무너뜨리다

박찬길 검사는 당시 광주지검 순천지청 차석검사로 근무했다.

 

그는 경찰의 조사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증거와 법률에 따라 좌익 관련 사건을 처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민간인을 사살한 경찰관에게 중형을 구형하는 등 경찰의 불법적인 공권력 행사에도 엄정한 태도를 취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갈등을 빚었고, 경찰은 박 검사를 ‘붉은 개’라는 뜻의 ‘적구(赤狗) 검사’라고 정보 보고까지 했다.

 

여순사건이 발생한 뒤 박 검사는 경찰에 체포됐고, 반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정식 재판 절차조차 거치지 못한 채 총살됐다.

 

법원이 수십 년이 지난 뒤 경찰의 보복성 불법행위를 인정했다는 사실은 이 사건이 단순히 혼란스러운 시대에 발생한 불행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여순사건 당시 군인들의 무장봉기가 있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무장행위에 대해서는 당연히 법적·역사적 책임을 따져야 한다.

 

그러나 무장봉기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과 무고한 사람을 충분한 증거와 적법한 재판 없이 처벌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국가가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지켜야 하는 마지막 원칙은 법치주의다.

 

누구든 증거에 의해 수사받고 법에 따라 재판받아야 한다.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적으로 규정하고, 법적 절차를 생략한 채 생명까지 빼앗는다면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국가폭력이 된다.

매카시즘과 ‘주홍글씨’… 이념의 광기가 낳은 희생

역사는 이념적 공포가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반복해서 보여줬다.

 

미국의 매카시즘 역시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정치적 낙인과 마녀사냥으로 번진 대표적 사례다. 공산주의자라는 의심만 받아도 개인의 명예와 직업, 사회적 관계가 심각하게 훼손되는 일이 벌어졌다.

 

한국 현대사에서도 ‘빨갱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정치적 비판을 넘어 상대방을 공동체 밖으로 밀어내는 위험한 낙인으로 사용된 적이 적지 않았다.

 

특히 국가권력이 이러한 낙인에 편승할 경우 그 피해는 훨씬 커진다.

 

한 번 찍힌 이념적 낙인은 ‘주홍글씨’처럼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밝혀지고 국가가 잘못을 인정하더라도 피해자의 생명은 돌아오지 않는다. 남겨진 가족들은 수십 년 동안 억울함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해방 이후 친일 경력자 청산이 충분히 이뤄지지 못했던 문제와 일부 권력기관 관계자들이 반공 체제 속에서 다시 영향력을 행사했던 역사 역시 냉정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다만 역사적 책임을 논할 때도 집단 전체를 하나로 묶어 단죄해서는 안 된다.

 

누가 어떤 행위를 했으며, 그 행위가 법과 인권을 어떻게 침해했는지를 구체적인 증거에 따라 밝히고 책임을 묻는 것이 올바른 역사 청산이다.

 

그것 역시 법치주의의 원칙이다.

진보와 보수를 넘어 ‘국익 중심의 실용주의’로

이념은 사회와 국가를 바라보는 하나의 가치 체계가 될 수 있다.

 

진보와 보수 역시 민주사회에서 서로 다른 관점과 해법을 제시하며 경쟁할 수 있다. 문제는 어느 한쪽의 이념이 절대적인 선이 되고 반대편을 악으로 규정하기 시작할 때 발생한다.

 

국가 운영의 최종 기준은 이념의 승리가 아니라 국민의 삶이어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에 필요한 것도 진보냐 보수냐를 끊임없이 가르는 정치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 경제적 번영,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를 실질적으로 지켜내는 정치다.

 

국익은 어느 정권이나 특정 정당의 이익을 의미하지 않는다.

 

국민이 안전하게 살아가고, 기업이 안정적으로 활동하며, 노동자가 정당한 대가를 받고, 청년들이 미래를 꿈꾸며, 다음 세대가 더 나은 대한민국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국익이다.

 

외교 역시 같은 원칙으로 접근해야 한다.

 

대한민국 안보의 중요한 축인 한미동맹을 굳건하게 유지하는 동시에 중국·러시아를 비롯한 주변 국가들과 필요한 경제협력과 외교적 소통을 이어가야 한다.

 

북한의 핵·미사일 등 군사적 위협에는 국민의 생명과 안보를 지키기 위해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 동시에 긴장 완화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대화의 가능성까지 스스로 닫을 이유는 없다.

 

친미냐 친중이냐, 보수냐 진보냐라는 단순한 이분법보다 중요한 질문이 있다.

 

“어떤 선택이 대한민국 국민의 안전과 경제, 미래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가.”

 

국가정책은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것이 실용주의이며 국익 중심 정치다.

 

역사는 묻는다… 국가는 국민을 지키고 있는가

박찬길 검사와 그의 아버지에 대한 국가배상 판결은 국가가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는 데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한지를 다시 한번 보여준다.

 

국가기관의 불법행위로 국민의 생명을 빼앗아 놓고도 제대로 된 책임 규명과 명예 회복이 수십 년 뒤에야 이뤄진다면 법치주의와 민주주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더 중요한 것은 과거를 기억하는 이유다.

 

과거의 잘못을 끄집어내 오늘의 또 다른 편 가르기를 만들기 위해 역사를 배우는 것이 아니다.

 

같은 잘못을 다시 저지르지 않기 위해 배우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적’으로 규정하고, 합리적 비판까지 배신으로 몰아붙이며, 정치적 이익을 위해 국민을 갈라놓는 일이 반복된다면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교훈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이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특정 이념을 승리시키는 데 있지 않다.

 

국민의 생명과 자유, 안전과 존엄을 지키는 데 있다.

 

78년 전 억울하게 희생된 박찬길 검사의 죽음은 오늘의 대한민국에 다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념이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가, 국민이 이념을 위해 희생돼야 하는가.

 

답은 분명하다.

 

이제 대한민국은 이념의 승리보다 국민의 삶을, 정치적 충성보다 법치주의를, 진영의 이익보다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앞세워야 한다.

 

과거의 비극을 기억하는 가장 올바른 방법은 어느 한쪽을 다시 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떤 권력도 국민의 생명과 법 위에 설 수 없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박찬길 검사 부자의 억울한 희생이 오늘 우리에게 남긴 가장 무거운 교훈이다.

작성 2026.11.03 15:03 수정 2026.11.03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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