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이진희] 향토 의리가 정의를 밀어낸다.

▲이진희/한국공공정책신문 칼럼니스트 ⓒ한국공공정책신문

 [한국공공정책신문=김유리 기자]  작은 마을에서 경찰은 낯선 공권력이라기보다 제복 입은 이웃에 가깝다. 파출소장은 마을 어르신들의 행사에 얼굴을 비추고, 순찰차가 지나가면 주민들은 반갑게 손을 흔든다. 정이 넘치는 마을이다. 그런데 이 친밀한 향토의 정서에 미덕만 있을까? 어쩌면 그 안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정의가 조용히 무너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향토 비리는 처음부터 뇌물 봉투가 오가는 것이 아니다. 명절 인사, 행사 후원, 술자리 동석 같은 호의가 먼저 오가고, 그것이 어느새 봐주기 청탁으로 바뀐다. 아는 사이라서 한 번쯤 눈감아 준 음주 운전, "우리가 남이가,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말로 대충 덮은 다툼, 융통성을 내세워 접수하지 않은 신고가 그렇게 생겨난다. 슬쩍 건네는 촌지에 "우리 사이에 뭘 이런 걸" 하며 허허 웃는 사이, 호주머니는 점점 불룩해진다. 호의를 받은 공권력은 빚진 공권력이 아니던가. 그러니 돈을 찔러 넣어 준 사람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기란 쉽지 않다.

 

이런 일이 쌓이면 마을의 불문율이 된다. 누구는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이고, 어떤 일은 신고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상식처럼 자리 잡는다. 법과 원칙보다 관계와 융통성이 먼저 작동하면 사람들은 인맥 관리에 바빠지고, 공권력이 지켜야 할 정의는 뒷전으로 밀린다. 문제는 금품수수에 그치지 않는다. 지역사회의 인간관계망 전체가 범죄를 덮는 장치로 작동한다는 데 있다.

 

이 구조에서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사람은 피해자다. 특히 가해자가 마을의 유력자일 때, 피해자는 사건 자체뿐만 아니라 '괜히 일을 크게 만드는 눈치 없는 사람'이라는 억울한 낙인까지 떠안은 채 마을 여론과 맞서야 한다. 이때 침묵은 피해자의 자발적 선택이 아니라 집단이 약자에게 강요하는 생존 방식이다. 마을이 침묵하면 경찰은 편해지고, 경찰이 편해지면 마을은 더 깊이 침묵한다. 이 악순환 속에서 사건은 처음부터 없었던 일이 된다.

 

실제 사례는 멀리 있지 않다. 2014년 전남 신안의 섬에서 드러난 이른바 '염전노예' 사건에서는 장애가 있는 이들이 수년간 임금도 받지 못한 채 강제노동에 시달렸지만 염전주와 섬 주민, 그리고 그들과 얽힌 지역 행정과 치안은 오랫동안 이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다. 2004년 경남 밀양의 고교생들이 여중생을 집단 성폭행한 사건에서는 수사 과정의 모욕적 언행과 피해자 신상 노출, 가해자 측의 합의 압박으로 피해자들은 고통을 겪었다.

 

연고의 그물은 마을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2026년 5월 광주 도심에서 일면식도 없는 여고생이 살해된 이른바 장○○ 사건에서는, 피의자의 부친이 현직 경찰 간부라는 사실이 알려진 뒤 핵심 증거물이 확보되지 않은 채 가족에게 넘겨지고 수사 상황이 새어 나갔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진상은 수사와 재판으로 가려지겠지만, 지역 사회내 연고가 수사의 공정성을 흔들 수 있다는 의심만으로도 공권력에 대한 신뢰는 크게 무너졌다.

 

세 사건의 양상은 다르지만 촘촘한 관계망이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 쪽에 서는 순간, 정의가 얼마나 쉽게 비켜 가는지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는 같다. 이 문제를 개인의 도덕성만으로 풀 수는 없다. 한 지역에 오래 머물수록 관계가 쌓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의 오랜 태만은 불가능을 개인의 인품에 맡겨놓았다는 것이다. 가해자와 같은 술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그 사건을 맡는 일은 제도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선량한 경찰을 기대하기보다, 관계가 공정을 해치지 못하게 하는 장치가 먼저다. 한 지역의 장기 근무를 제한하는 순환 근무, 사건 관계인과 연고가 있으면 스스로 사건에서 빠지게 하는 회피 제도, 지역 바깥의 눈으로 들여다보는 외부 감찰이 그 출발점이다. 신고 접수부터 수사 종결까지 모든 과정은 기록으로 남아 사후에 검증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피해자가 마을 안의 인맥을 거치지 않고도 닿을 수 있는 독립된 신고 창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제도만으로는 부족하다. 유착은 불편한 일을 묻어 두는 편이 모두에게 안전하다는 공동체의 셈법 속에서 자란다. 따라서 친밀함이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기본 상식부터 다시 세워야 한다. 이웃의 얼굴을 한 권력 앞에서 불편해질 용기가 없다면, 우리가 지키는 것은 공동체가 아니라 공동체 안의 서열일 뿐이라는 것을 명심해야할 것이다.

 

▲우리가 남이가(필자 이진희 제공) ⓒ한국공공정책신문



 이진희   

서울대학교 대학원 졸업(교육학박사)

(현) 진해세화여자고등학교 교장

(전) 서울대학교 강사

(전) EBS 수능윤리 강사



 

 


작성 2026.11.02 11:59 수정 2026.11.0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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