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가로수길에 고정수의 여인들이 사는 법
점심시간의 바쁜 도심, 회색빛 빌딩 숲을 가로지르는 직장인들의 발걸음이 아스팔트 길목에서 문득 멈춰 선다. 번쩍이는 유리 빌딩과 차가운 콘크리트 사이, 둥글고 풍만한 어깨로 툭 걸터앉아 이웃을 바라보는 거대한 화강암 여인상. 혹은 공원 벤치 옆에서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사색에 잠긴 곰 한 마리.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치는 이 풍경들은 사실 한국 구상 조각의 거장 고정수 작가가 세상에 던지는 가장 다정한 안부 인사이자, 도심 속 거대한 야외 미술관의 생생한 한 장면이다.
많은 원로 작가들이 거창한 개인전이나 미술관 초대전이라는 틀에 머물러 있을 때 고정수 작가는 일찌감치 그 성벽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의 손에서 빚어진 넉넉한 엉덩이의 여인들과 해학 넘치는 곰들은 전국 각지의 병원 로비, 공원, 아파트 단지 앞 분수대와 거리 곳곳에 터를 잡았다.
“예술이 일부 애호가들만의 높은 탑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그의 철학은 곧 공간의 민주화였다. 권위주의와 딱딱한 기교를 싹 지워낸 그의 조각 앞에서는 아이들이 서슴없이 매달려 장난을 치고, 지친 직장인이 벤치에 앉아 말없이 등을 기대며 위안을 얻는다. 갤러리의 하얀 조명 아래 유리관에 갇힌 예술품이 아니라, 비를 맞고 눈을 맞으며 시민들의 손때가 묻는 곳에 진정한 생명력이 깃든다는 게 그의 굳은 지론이다.
실제로 그의 조각들은 ‘시각’을 넘어 ‘촉각’으로 완성된다. 만지면 차갑기는커녕 오히려 어머니의 품처럼 훈훈한 온기가 느껴질 것 같은 둥근 곡선들은, 회색빛 도시에서 길을 잃은 현대인들에게 소리 없는 해방구이자 따뜻한 쉼표가 되어준다. 누구나 손을 뻗어 쓰다듬을 수 있는 그의 작품들은 차가운 돌덩어리에 불과했던 재료를 만인의 이웃이자 친구로 탈바꿈시켰다. 미술관 문턱을 낮추고 거리를 전시장으로 만든 그의 뚝심은 지금도 우리 곁의 가로수길과 공원에서 다정하게 숨 쉬고 있다.
◇우리 곁으로 걸어온 예술, 거리의 풍경을 바꾸다
공공미술이라는 개념이 지금처럼 보편화되기 전부터, 고정수 작가는 조각의 진짜 자리가 대중의 삶 속에 있어야 함을 직감했다. 서구적 비례의 미학을 좇던 한국 조각계의 주류 흐름 속에서 그가 끊임없이 대중을 향한 구체적 형상을 고집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밀로의 비너스나 미켈란젤로의 완벽한 신체적 대칭 대신,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웃들의 정겨운 체형을 돌과 브론즈로 옮겨온 것은 대중과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기 위한 가장 강력한 장치였다.
어깨가 둥글고 허벅지가 튼실하며, 시골 아낙네처럼 푸근한 미소를 머금은 그의 여인상들은 공원이나 광장에 놓이는 순간 주변 공간의 성격을 완전히 바꿔놓는다. 딱딱하고 경직된 도시의 건축물 사이에 놓인 그의 넉넉한 볼륨은 공간에 유연한 리듬감을 부여한다. 차가운 대리석 건물이나 각진 시멘트 구조물이 주는 살벌함을 이웃집 누이 같은 푸근한 형상이 부드럽게 감싸 안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진 ‘곰’ 연작의 등장은 이러한 대중 소통의 방식을 한 단계 더 진화시켰다. 야생의 맹수처럼 무섭거나 거칠지 않고, 의자에 앉아 사색에 잠기거나 턱을 괸 채 능청스럽게 누워 있는 곰들의 모습은 남녀노소 누구나 웃으며 다가갈 수 있는 친근한 매개체가 되었다. 단군신화 속 웅녀의 서사를 차용하면서도, 그 속에 현대인들이 누리고 싶은 ‘게으름의 여유’와 ‘해학’을 담아냈다. 난해하고 무거운 현대 미술에 피로감을 느끼던 대중에게 이 곰들은 가장 유쾌하고 위로가 되는 친구였다.
이처럼 그의 조각이 거리에 스며들면서 도시는 예술을 매개로 한 소통과 휴식의 장소로 변모했다. 누군가는 출근길에 곰의 머리를 가볍게 쓸어넘기며 하루의 긴장을 풀고, 누군가는 하굣길에 여인상의 둥근 곡선에 기대어 친구를 기다린다. 예술이 삶 속으로 걸어 들어왔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마법 같은 일상의 풍경들이다.
◇땀방울로 빚어낸 아날로그의 진정성
대중의 사랑을 받는 공공미술의 이면에는 작가가 매일같이 감내해야 하는 치열한 육체적 노동과 고독한 수행의 시간이 자리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그의 작품을 보며 부드러운 곡선과 따뜻한 미소만을 떠올리지만, 그 형상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극도의 인내를 요구하는 거친 중노동의 연속이다.
그의 작업실은 언제나 하얀 돌가루와 흙냄새로 가득하다. 수십 톤에 달하는 화강암이나 오석 덩어리를 크레인으로 들어 올리고, 정과 망치를 쥔 채 하루에도 수만 번씩 돌을 내리치는 작업은 청년 조각가에게도 버거운 일이다. 주변에서는 이제 그만 편안하게 주조 작업을 하거나 제자들에게 맡기라는 권유를 건네기도 하지만, 그는 매번 손사래를 친다. “돌을 깎으며 내리치는 그 순간만큼, 내가 살아 숨 쉬고 있음을 강렬하게 느끼는 때는 없다”는 것이 그의 꼿꼿한 신념이다.
디지털 미디어와 인공지능(AI)이 예술의 영역을 빠르게 대체하고, 버튼 하나면 완벽한 3차원 형상이 찍혀 나오는 첨단의 시대에 고정수의 작업실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원시적이고 아날로그적인 시간 속에 멈춰 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그의 땀방울이 고스란히 밴 돌덩어리들은 기계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생명력을 품는다. 뼈를 깎는 수고로움과 작가의 손끝 감각이 온전히 투여된 조각만이 가질 수 있는 독보적인 온기가 그 안에 살아 숨 쉰다.
석조 작업은 돌이 가진 고유의 결을 거스르지 않는 과정이기도 하다. 억지로 모양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돌이 가진 자연스러운 색조와 흐름을 읽어내어 여인의 부드러운 옷자락이나 신체의 음영으로 녹여낸다. 거친 화강암의 껍질을 한 겹씩 깨부술 때마다 그 속에서 고개 내미는 아기 피부처럼 보드라운 질감은, 오랜 세월 동안 돌과 대화해 온 장인만이 찾아낼 수 있는 예술적 경지다.
◇시대의 온도를 높이는 영원한 ‘대지의 품’
예술가로서 이미 최고 권위의 상을 거머쥐었고, 후학들에게 귀감이 되는 거장의 반열에 올랐음에도 고정수는 여전히 현장에 머문다. 그가 빚어낸 여인상과 곰들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차분한 조명 아래서도 빛을 발하지만, 역시 가장 빛나는 순간은 북적이는 도심의 공원 한켠에서 평범한 이웃들의 손길과 시선을 마주할 때다.
디지털의 가상공간이 실제의 자리를 빠르게 잠식해 가는 오늘날, 고정수 작가의 아날로그적 작업과 공공미술이 지니는 가치는 더욱 각별하다. 화면 속에서 순식간에 소비되고 사라지는 이미지들과 달리, 거리에 묵묵히 뿌리를 내린 그의 화강암 조각들은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비바람을 맞으며 자리를 지키고 앉아 도시의 온도를 높인다.
인간다움의 본질이 무엇이며, 우리가 바쁜 일상 속에서 잃어버린 마음의 고향은 어디에 있는지를 그는 묵묵한 돌의 언어로 질문한다. 유행에 흔들리지 않는 뚝심으로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생명의 원형을 길어 올린 조각가. 오늘도 누군가의 출퇴근길을 말없이 지켜주며 미소 짓게 만드는 고정수 작가의 돌 조각들은, 앞으로도 시대를 초월해 삶에 지친 모든 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적셔줄 영원한 ‘대지의 품’으로 우리 곁에 살아 숨 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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