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에서 나만 살아남았다는 부채감이 평생을 따라다녔다. 포탄이 빗발치던 안케패스 고지에서 피를 흘리며 넘어진 동료들의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내가 숨 쉬는 한, 그들의 희생을 세상에 알리고 남겨진 가족들을 돌보는 것이 내 삶의 마지막 임무다”
이필영 안케패스전투 대혈전 전승전우회 운영위원장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만감이 교차하는 듯 떨렸다. 월남전 참전용사이자 치열했던 전장의 기록자, 그리고 전후 반세기 동안 전우들의 명예 회복에 삶을 바쳐온 인물. 8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의 시계는 여전히 1972년 베트남 안케패스 고지의 붉은 흙먼지 속에 맞춰져 있었다.
◇안케패스의 포성, 그리고 빼앗긴 청력... 전장에서 시작된 기록자의 사명
1972년 4월, 베트남 중부 고원지대의 요충지인 19번 도로를 확보하기 위해 벌어진 ‘안케패스 전투’는 월남전 사상 한국군이 치른 가장 치열하고 참혹했던 격전 중 하나로 꼽힌다. 당시 맹호부대 포병 관측장교로 전선 최전방에 투입된 이필영 위원장은 빗발치는 적의 포격과 아군의 진내사격이 교차하는 사선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포탄이 바로 코앞에서 터졌다. 고막이 터져 나가며 피가 흘렀고, 입술과 팔에 파편이 박혔다. 한쪽 귀의 청력을 완전히 잃었지만, 최전방 관측장교가 무너지면 포병 지원이 끊겨 우리 중대 전체가 몰살당하는 상황이었다. 보청기도 없어 소리를 듣지 못한 채 고지를 지켜야 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이 위원장은 한국에서 가져갔던 카메라 한 대를 들고 전장을 누볐다. 전령과 동료 장병들에게 부탁해 포탄이 날아드는 포진지의 모습, 적의 포격으로 포신이 터져버린 처참한 광경, 드럼통을 연결해 고지로 진격하던 순간들을 사진으로 남겼다. 그가 목숨을 걸고 렌즈에 담아낸 기록들은 훗날 안케패스 전투의 실상을 증언하는 유일무이한 역사적 사료가 되었다.
◇사비 들여 복원한 ‘전승 기념비’... 육사 박물관 유물로 솟아오르다
이 위원장의 전우애와 역사의식은 전역 후에도 식지 않았다. 베트남 철수 당시, 그는 포격으로 찢기고 꺾였으나 전장의 포성을 견뎌낸 현지의 거목을 가슴에 품고 귀국했다. 쉽게 썩지 않는 단단한 성질을 가진 이 나무는 안케패스 고지에서 피 흘린 맹호부대원들의 혼이 담긴 상징물이었다.
“세월이 지나 국립묘지와 박물관을 찾아갔더니, 그 흔적들이 하나둘 부식되고 잊혀 가고 있었다. 내가 가져온 푸조나무 역시 지하 창고에서 썩어가는 것을 보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주저 없이 사비를 들였다. 보존 처리 전문가를 찾아가 나무의 부식을 막는 화학 처리와 리니시 작업을 거쳤고, 전우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새긴 동판과 좌대를 제작했다. 이러한 그의 집념과 노력 덕분에 이 전승 기념비는 2년 전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의 공식 유물로 지정되는 결실을 맺었다. 수십만 점의 군사 자료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보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또한 그는 베트남 현지를 수십 차례 오가며 안케패스 정상에 전승비를 세우는 데 앞장섰다. 40톤이 넘는 원석을 맹호전우들과 함께 도르래와 나무 받침으로 끌어올리며 전승추모비를 638고지에 세웠다. 전승비를 세우고 월남에서 철수하자 월맹군은 수많은 시설물을 흔적도 없이 철거했지만, "맹호의 용맹성을 우리도 교훈으로 삼을 증표"라며 월맹 국방장관이 그대로 두라고 하여 54년이 지난 지금도 안케패스 정상에 우뚝 서 있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낯선 타국 땅, 베트남의 붉은 흙바람 속에서도 내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오직 그곳에서 피 흘리며 쓰러져간 내 전우들의 희생이 세월의 풍파 속에 잊혀지거나 헛되지 않았음을 세상 끝까지 증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포로 생환 전우의 눈물을 닦다... 잊힌 영웅들의 명예 회복
이 위원장의 발걸음은 가장 그늘지고 소외된 전우들에게로 향했다. 안케패스 전투 당시 실종되었다가 330일 만에 미군과의 포로 교환으로 극적으로 생환한 유종철 병장의 사연은 그의 가슴을 가장 아프게 한 기억 중 하나다. 유 병장은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북한 장교의 회유와 고문을 견디며 세 차례나 탈출을 시도했던 참된 군인이었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온 후 심각한 전쟁 트라우마에 시달렸고, 사회 적응에 실패하며 불우한 삶을 살다 전과를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이로 인해 국립묘지 안장 심사에서 번번이 거부당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전쟁이 만든 상처 때문에 평생을 고통 속에 살다 간 전우였다. 포로로 잡혀서도 끝까지 지조를 지킨 영웅을 국가가 외면할 수는 없었다. 내가 직접 포탄과 휘발유를 들고 찾아가 싸우겠다는 심정으로 정부 부처와 언론을 설득했다”
이 위원장은 유 병장의 생전 기록과 포로 교환 당시의 사료를 수집해 국방부와 보훈부를 설득했고, 언론 제보를 통해 사연을 공론화했다. 결국 심의위원회의 전향적인 결정을 이끌어내며 유 병장을 서울현충원 전우들의 곁에 안장시킬 수 있었다.
또한 제주도 야산의 묘지에 홀로 잊혀 있던 참전용사 부인호 상병의 사연을 접하고, 유가족을 설득해 제주현충원이 개원했을 때 ‘제1호 안장 유해’로 모시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전 국토를 누비며 전우들의 유해와 기록을 찾는 그의 집념은 수많은 유가족에게 비할 데 없는 위로를 전했다.
◇“보훈은 국가의 품격... 마지막 한 사람까지 기릴 것”
전역 후 대우중공업에 입사해 생산과 기획, 노사관리 분야에서 맹활약하고, 이후 발전기 전문 기업인 부시파워ENC를 설립해 견실한 경영인으로 살아온 이필영 위원장.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을 드러내거나 참전 혜택을 요구해 본 적이 없다. 대신 매년 4월 24일이면 전국의 안케패스 참전 전우와 유가족 400여 명을 초청해 사비와 전우회 자발적 모금으로 추모식을 개최하고 있다. 국가의 지원에 의존하지 않고 전우들이 직접 주머니를 털어 만드는 이 행사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순수하고 뜨거운 전우애의 장으로 평가받는다.
최근에는 초급간부(하사·소위)들의 열악한 처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방혁신위원회 및 정부 관계자들을 직접 만나 수당 인상과 복지 개선을 건의하는 등 군 발전과 안보를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고 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거창한 훈장이나 보상이 아니다. 제복 입은 영웅들이 흘린 피와 땀을 국가와 후손들이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것, 그것 하나뿐이다"
자신의 한쪽 청력을 베트남 전장에 묻고 온 이필영 위원장. 그러나 전우들의 숨소리와 남겨진 이들의 눈물 소리에는 그 누구보다 민감하게 귀를 기울여온 그의 삶은, 참된 보훈이 무엇이며 국가관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우리 사회에 묵직한 울림으로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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