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한정찬] (시) ‘보드라운 바람' 외 4편

[한국공공정책신문=김유리 기자] 한정찬 시인의 시 ‘보드라운 바람' 외 4편


 

보드라운 바람 외 4편

 

 

산골 모든 신록이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흔들린다.

 

보드라운 바람이 부는 까닭이다. 

 

깊은 골짜기 시냇물 소리 깊어질수록

고요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싱그러운 어름 나무 넝쿨 아래

하얀 과육이 가볍게 출렁인다. 

 

흰 구름 한 무리 지나가는 동안

보드라운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나는 한가롭게 한참을 서 있다. 

 

 

* 시작 노트

산을 거닐다가 문득 바람이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바람은 신록을 흔들고, 시냇물 소리를 깊게 하며, 어름 나무 넝쿨 아래 잘 익어 벌어진 열매를 출렁이게 했다. 그 작은 움직임들 속에서 자연이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모습을 느꼈다. 바람이 스쳐 간 자리에 남아 한동안 자연의 숨결을 바라본 순간을 담고 싶었다. 

 

 

 

농사와 기후

 

 

농사짓는 기간에는 수시로

주간일기예보를 검색한다.

 

주간일기예보를 넘기고

시간대별 강수확률에

날마다 그 하루를 건다.

 

비는 퍼센트 확률로 뜨지만

전답에서는 생사의 지문이 된다.

 

가뭄이 길어지면

농작물이 타들어 가 가슴이 갈라진다.

 

장마가 때면 

농작물이 쓰러지고 묻혀 가슴이 먹먹하다. 

 

그럴 때마다 문득,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말이

낡은 쟁기처럼 떠오른다.

 

농사철만 되면

등이 먼저 계절을 알아차린

아버지.

 

손마디마다

논밭의 시간이 박혀 있던

어머니.

 

흙냄새를 맡으면

나는 아직도

그들의 하루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농부에게 기후는 변수다. 

씨를 뿌리기 전부터

수확을 마칠 때까지.

 

머리 위에 놓인

가장 크고 오래된 이름을 본다. 

거스를 수 없는 하늘이다.

 

 

* 시작 노트

농부의 하루는 가장 먼저 주간일기예보의 검색에서 시작된다. 스마트폰 속 강수확률과 주간 예보는 이제 농사일의 중요한 정보가 되었다. 가뭄과 장마 사이에서 작물의 운명을 지켜보며, 한 생애를 흙과 함께 살다 가신 부모님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단비

 

 

푸석한 밭이랑의 두 눈이

갈라진 논바닥의 입술이

하늘만 올려다보던 날에,

 

잎마다 마른 숨이 꺼져가게

햇빛은 농작물의 등짝을

끝없이 시들어 말리고 있었다.

 

그때, 일기예보 따라,

먼 산 너머 먹구름 보다

빗소리가 먼저 왔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드디어 후드득 후드득 내려

메마른 땅은 깊은숨을 들이쉬고

축 처졌던 잎들은 모두 활기가 차

비로소 살아 나 고개를 들었다.

 

밭고랑 사이로

논바닥 사이로

흠뻑 내린 빗물에

살아난 농작물 목숨이 번져 간다.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던

농부의 희열에 찬 얼굴에

젖은 웃음 하나 크게 피어났다. 

 

비가 온다.

생명을 잃어가던 농작물이

오래 기다리고 기다린 단비가 온다.

 

이렇게

단비가 고맙게 내리면

땅이 젖어 농작물도 팔팔 살고

농부의 근심도 사라져 생기가 돈다. 

 

 

* 시작 노트

해마다 농사를 지으면서 오랫동안 비를 기다리던 농작물과 농부의 마음에서 출발했다. 가뭄으로 메마른 땅과 시들어 가는 작물의 모습을 보며, 한 줄기 단비가 얼마나 큰 희망이 되는지 수없이 체험했다.  비가 내리는 순간 땅은 생기를 되찾고 농작물은 다시 고개를 들며, 농부의 얼굴에도 환한 웃음이 번진다. 단비가 단순한 비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마음까지 위로하는 소중한 존재임을 표현하려고 했다. 

 

 

 

그리운 풍경

 

 

옥수수 씨앗을 세 개씩 심었다.

 

한 개는 땅에 주고

한 개는 새에게 주고

한 개만 자라길 기대했는데

 

땅이 비옥하고

새가 오지 않아

세 개 모두 발아해

튼실하게 자라고 있다.

 

옥수수가 무릎 높이만큼 자랐을 때

순차적으로 수확하게

또 세 개씩 심었다.

 

옥수수로 간식을 했든

내 유년의 기억이 새롭다. 

 

‘기찻길 옆 옥수수밭’ 가사 구절이

내 유년의 18번지를 호출하고 있다.

 

하늬바람에 더위가 기승부리고

온 산하에 진초록이 늘어질 때

내 동생을 업은 누나가 오고 있다.

 

내 누나의 얼굴에 맺힌 땀방울처럼

도열 하듯이 늘어선 옥수수 그루에

아침 이슬방울이 송알송알 맺혀있다.

 

 

* 시작 노트

옥수수 씨앗을 세 알씩 심으며 시작된 이야기는 풍성한 수확의 기대를 넘어 유년의 기억으로 이어가고 싶었다. 땅과 새를 위해 나누어 두었던 씨앗이 모두 싹을 틔우듯, 잊고 지냈던 추억 또한 생생하게 되살리고 싶었다. 초록으로 짙어가는 여름날, 기찻길 옆 옥수수밭과 동생을 업은 누나의 모습은 세월을 건너와 현재의 풍경과 겹쳐보았다. 

 

 

 

고독한 농부

 

 

그만 가보자. 

나눌 말은 다 나누었고

마음의 등짐도 내려놓았다.

 

사랑과 우정의 불빛,

시련과 고독의 그림자를 지나

후회마저 먼 추억이 되었다. 

 

출발은 끝이 아니라

또 하나의 미지 목표다. 

 

길을 알기 전에 걷고,

꿈을 알기 전에 나아간다.

 

떠나며 다시 길을 찾는다. 

나는

끝없는 지평을 향해 걸어가는

또 한 사람의 고독한 농부. 

 

 

* 시작 노트

우리는 늘 출발과 도착 사이를 살아간다. 사랑과 우정, 시련과 고독을 지나며 얻은 것은 완벽한 답이 아니라 다시 길을 나설 용기다. 끝을 향해 가면서도 새로운 길을 찾는 한 인간의 고뇌를 담고. 후회와 미련을 내려놓고, 미지의 지평을 향해 걸어가려는 마음, 현실을 알면서도 외면하지 못하는 고독한 농부를 각인하고자 했다. 

 

 

▲한정찬/한국공공정책신문 칼럼니스트 ⓒ한국공공정책신문

 

한정찬

□ (사)한국공무원문학협회 고문, (사)한국문인협회원, (사)국제펜한국본부회원, 한국시조시인협회원 외

□ 시집 ‘한 줄기 바람(1988)외 29권, 한정찬시전집 2권, 한정찬시선집 1권’ 외

□ 농촌문학상, 옥로문학상, 충남펜문학상, 충남문학대상, 충청남도문화상 외



작성 2026.06.22 22:45 수정 2026.06.22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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