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한정찬] (시) 바다 앞에서 외 4편

[한국공공정책신문=김유리 기자]  시인 한정찬의 바다 앞에서 외 4편

 

바다 앞에서 외 4편

 

 

바다는,

 

칼 한 자루를 품고

밤새 푸른 물결 속에서

제 심장을 벼린다. 

 

우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리움을 배우고

바다를 바라보며

경외의 깊이를 배운다. 

 

나는

일출과 일몰 사이

잠시 빛나는 생의 길목에서

한 생을 건너고 있다. 

 

아,

시대의 바람은 쉼 없이 등을 밀고

영혼은 흔들리는 불꽃처럼 깨어난다. 

 

무너진 자리마다

새로운 다짐을 심고

지워진 길 위에

다시 길을 낸다. 

 

바다가 끝내 수평선을 포기하지 않듯

우리 또한

닿지 못할 빛을 향해

날마다 한 뼘의 새벽을 밀어 올린다. 

 

 

* 시작 노트

바다는 단순한 자연의 풍경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벼리며 존재를 유지하는 내면의 은유로 바라본다. 인간은 그 바다 앞에서 하늘을 그리워하고, 동시에 그 깊이를 두려워하며 일출과 일몰 사이의 짧은 생의 시간을 건넌다. 시대의 거센 흐름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으려는 영혼의 움직임, 매일 다시 길을 내고 다짐을 심는 존재의 태도를 통해, 끝내 닿지 못할 빛을 향해 나아가는 삶의 지속성과 아름다움을 말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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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게 흐르는 일

 

 

물은

돌을 밀어내지 않는다. 

 

몸을 낮추어

굽이마다 제 모양을 바꾸고

마침내

돌마저 품은 길이 된다. 

 

산 아래 누운 마음에는

저녁 바람도

말을 줄여 스며들고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환한 문장 몇 줄보다

다 지나간 뒤에도

가만히 머물러 있는 눈빛 하나. 

 

삶은 아마

단단함과 부드러움의 그 사이에

부서지지 않을 만큼만 굽이치며

끝내 제빛을 흐려 잃지 않는 일. 

 

맑게,

오래 흐르는 일.

 

 

* 시작 노트

물은 돌을 밀어내지 않지만, 오래 흐르며 결국 자신의 길을 만든다. 사람의 마음 또한 그러하다고 믿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거창한 말보다 오래 머무는 온기와 조용한 시선에 가까운 일일지도 모른다. 흔들리면서도 맑음을 잃지 않는 것, 부드러움 속에서 스스로를 지켜내는 것. 그 느리고도 깊은 흐름을 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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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힘

 

 

이랑을 내고

땅콩 씨앗을 묻었다. 

 

흙이 살짝 부풀더니

어느 날 밭의 

연약한 싹들이

세상을 밀어 올렸다. 

 

흙을 떠받들고 선 모습이

강화군의 고인돌 같고

화순군의 고인돌 군 같다. 

 

작은 것들이

큰 것을 닮을 때가 있다. 

 

살다 보면

이유를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땅콩 씨앗들이

제 몸보다 무거운 흙을 들어 올리듯

기적은 멀리 있지 않다. 

 

설명보다 먼저

힘으로 오는 것. 

 

땅콩 싹들의 저 놀라운 힘.

 

 

* 시작 노트

땅콩을 밭에 정성껏 심은 씨앗들이 어느 날 제 몸보다 무거운 흙을 밀어 올리며 싹이 돋았다. 그것을 바라보다가 문득 고인돌이 떠올랐다. 수천 년의 시간을 견딘 거대한 돌과 이제 막 세상 밖으로 나온 연약한 땅콩 싹들이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이 시는 그 순간의 놀라움에서 시작되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생명의 움직임 속에는 아직도 설명할 수 없는 힘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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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

 

 

품 안의 뿌리는

멀리 뻗지 못한다던

그 말씀.

 

모내기 철이면

문득 떠오른다.

 

모들은

제 흙을 조금씩 품은 채

새 물이 머무는

무논으로 간다.

 

감꽃이 진다.

꽃을 버린 자리마다

튼실한 열매가

더 영글어 간다.

 

 

* 시작 노트

옮겨심기는 모와 때가 되면 스스로 꽃을 떨구는 감나무를 함께 떠올리며, 성장에는 떠남과 버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담고자 했다. 새로운 자리로 옮겨 가는 일도, 소중한 것을 내려놓는 일도 아픔을 동반하지만 결국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삶의 뿌리를 더욱 깊게 내리는 과정임을 말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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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음자리표

 

 

성벽 입구,

 

고목에 걸린 바람이

새벽을 휘감아

허공에 높은음자리표를 건다. 

 

해(日)보다 먼저 온 먼동이

구름의 이마를 닦는다.

 

지난밤 잠들지 못한 내 언어는

영혼의 가장자리에 웅크린다. 

 

바람은 지나가지만

대지의 그늘에서

 

외로움은 꽃이 되고

견딤은

밝아오는 빛이 된다.

 

 

* 시작 노트 

새벽은 언제나 가장 고요한 얼굴로 우리를 맞이한다. 그러나 그 고요 속에는 밤새 떠돌던 바람과 잠들지 못한 언어들이 숨어 있다. 이 시는 성벽 입구 고목에 걸린 바람이 허공에 남긴 높은음자리표에서 시작된다. 지나가는 바람처럼 보이는 시간 속에서도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고 대지의 그늘에서 꽃이 된다. 결국 삶이란 견디는 일이며, 견딤은 가장 늦게 아름다워지는 존재의 방식임을 새벽의 풍경을 통해 말하고자 싶었다.

 

 

▲한정찬/한국공공정책신문 칼럼니스트 ⓒ한국공공정책신문

 

한정찬

□ (사)한국공무원문학협회 고문, (사)한국문인협회원, (사)국제펜한국본부회원, 한국시조시인협회원 외

□ 시집 ‘한 줄기 바람(1988)외 29권, 한정찬시전집 2권, 한정찬시선집 1권’ 외

□ 농촌문학상, 옥로문학상, 충남펜문학상, 충남문학대상, 충청남도문화상 외


작성 2026.06.06 18:24 수정 2026.06.06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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